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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욕의 세계 (野慾世界) - 9부
16-03-09 21:43 4,862회 0건



“혹시 슈트 있어요?”
“예, 현대 남성 슈트의 기본인 18세기 유럽식 수제명품 남성정장을 가지고 있죠. 셔츠의 프릴 장식, 소매부분 커프스 장식, 화려한 웨이스트 코트,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금, 은 트리밍, 자수 장식…….”
“됐어요.”

그의 설명이 길어지자, 그녀가 차갑게 잘라버렸다. 뭐하나 정상적인 게 없다.

“슈트를 사서 원장님께 입혀드리고 싶어요.”
“사주는 겁니까?”
“물론, 원장님 돈으로.”
“제가 왜 제 돈으로 그래야 합니까?”
“싫으세요?”

그녀가 빙긋 웃으며 그를 올려봤다.

“갑시다. 문어대가리도 됐는데 까짓 슈트쯤이야. 제 차로 가죠.”
“헐…… 그 핑크색 여자 차요? 싫어요.”
“차가 싫은 거예요?”
“아뇨.”
“그럼 혹시, 운전면허 있으세요?”
“네. 왜요?”
“여자 차라면서요?”
“오!”




시트로엥 DS3 핑크색 차량이 면목동에서 동부간선도로를 타고 압구정동 방향으로 100km 가까운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야호!”
“수, 수라씨, 여기 제한속도 80km입니다. 속도 줄이세요.”

속도를 내며 즐거워하는 수라와 달리 갑대는 창백해진 얼굴로 불안에 떠는 모습이었다.

“고속도로에서 누가 제한속도 지켜요. 갑시다!”
“카메라 걸리면 딱지떼는 거 알죠?”
“누굴 바보로 아나. 걱정도 팔자네요. 내비 언니가 다 가르쳐줘요.”

그녀는 카메라위치를 말해주는 내비게이션을 가리켰다.




시트로엥 자동차는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주차장에 멈춰 섰고, 둘은 4층 남성정장 매장으로 향했다. 다양한 수입브랜드 중에서 수라는 무난한 닥스를 택했다.

“수라씨 닥스는 흔한 브랜드입니다. 고를 색도 별로 없어요. 까날리로 하죠.”

그가 투덜댔다. 닥스는 영국 브랜드로 버버리와 함께 체크무늬의 상징이며, LG패션에서 수입해 강남에서 키웠다고 할 정도로 흔했다. 반면 까날리는 이탈리아 브랜드로 민트, 블루, 퍼플등 패셔너블 컬러가 많아 연예인들이 즐겨 입는다.

“무채색 슈트 멋있잖아요.”

그녀는 은은한 체크패턴의 클래식 투버튼 정장을 꺼내들었다.

“저는 무채색 싫어요. 요즘 아이돌만 되도 컬러풀한 슈트를 댄디 스타일로 입습니다.”
“그만 좀 징징대세요.”

수라는 꺼내든 정장을 갑대에게 내밀었고, 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정장을 받아들고 탈의실에 들어가 갈아입었다. 그런데 탈의실에서 정장을 입고 나오는 그의 모습은 꽤 괜찮았다. 그녀는 ‘이것 봐라.’ 하면서 내친김에 그를 다른 매장으로 끌고 가 헌팅캡 모자와 선글라스도 사서 씌웠다.

“역시! 원장님은 스타일이 받쳐줘서 이렇게 입으니 근사하네요.”
“근사하게 만들어주고 싶었으면 왜 문어대가리를 만들고 눈썹을 밀은 겁니까?”

그녀의 박수 호응에 그는 오히려 역정을 내며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어 보였다. 아무리 스타일 좋은 슈트를 입어도 눈썹 없는 대머리는 흉측했다.

“아우! 꼴보기 싫으니 얼른 가리세요.”
“누가 이 꼴로 만들었는데요?”
“인과응보. 죄가 있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죠.”
“그럼 이걸로 용서해주는 겁니까?”
“아뇨.”
“뭐, 좋습니다. 일단 식사나 하러 가죠.”
“하! 제가 왜 원장님하고 식사를 해요?”

그녀가 그를 째려봤다.
“이정도 차려입었으면 저랑 같이 밥 먹는 게 그렇게까지 싫지는 않잖아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싫어요.”
“너무하시네요.”
“너무한 건 그쪽이죠. 성범죄와 스토커로 저를 괴롭혀놓고 같이 식사 타령이 나옵니까?”
“그건…… 아참, 그러고 보니 산부인과에 온 날은 선 본겁니까? 그때는 굉장히 여성스럽고 예뻤는데…….”

처음 본 그녀의 아름다웠던 모습과 지금의 털털한 선머슴 같은 모습은 전혀 매치되지 않았다.

“제 나이가 몇 살인데 선을 보나요?”
“그럼요?” “신경 끊으세요!”

짜증난다는 듯 그녀가 버럭 화를 냈다.

“수라씨. 옷 사러갑시다. 제가 여성스럽고 예쁜 걸로 사드릴게요.”
“싫어요.”
“제 돈을 탕진하게 만드는 복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원장님이 원해서 하려는 건 복수가 아니에요. 욕망 충족이지. 아무튼, 이정도면 얼추 악감정은 사라진 거 같네요.”
“정말입니까?”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 그러니 여기서 헤어지고 다시는 절 찾아오지 마세요. 만약 다시 스토커 짓을 하면 진짜 용서 안할 거예요.”

그녀가 휙 돌아서서 어깨위로 손을 흔들며 저만큼 멀어져갔다. ‘이렇게 끝인가?’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체념하려 했다. 그러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빠른 걸음으로 ?아가서 그녀를 앞질러 가로막았다.

“왜요? 더 볼일 있어요?”

그녀가 퉁명스런 말투로 그를 올려봤다. 그는 눈을 감고 어금니를 악물면서 아이디어를 쥐어 짜내려했다. 어떻게든 그녀를 잡고 싶은데, 핑계가 생각나지 않았다. 식사나 하자고 해도, 싫어요. 하면 대책이 없고, 사귀자고 하면, 당연히 거절할거다.

“으…….”

그는 혼신의 연기로 아픈 척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미 연기라는 걸 간파하고 있었다. 참 어설프게 연기하고 거짓말 못하는 성격이다. 자기가 왜 산부인과에서 멍청하게 속았는지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다.

“원장님 연기하는 거 다 알아요.”
“으…… 그, 그렇게 생각한다면 신경 쓸 거 없어요. 가던 길 가세요.”

그녀는 동요도하지 않았지만 그 또한 얼굴에 철판을 깔고 꿋꿋하게 로봇연기를 했다.

“그럼, 저 갑니다.”
“사, 사실 저는 강박증에 의한 불안장애 증상이 있어요. 머리를 밀고 평소 안 입던 슈트를 입으니 불안장애 증상으로 죽을 거 같습니다. 일종의 정신병이죠. 느끼셨겠지만 제가 좀 정상이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그가 짜낼 수 있는 최대한의 거짓말이었다. 물론, 그녀가 보기에는 측은하다 못해 처절해 보였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거짓말 안 믿어요.”
“구십구 퍼센트 거짓말이라고 예측해도 일 퍼센트가 진실이면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는 거죠. 아! 그때 믿을걸. 그런 게 인생이죠. 제가 백퍼센트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네, 장담할 수 있어요. 백퍼센트 거짓말이에요.”

그렇다.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이었다.

“그럼 가던 길 가세요. 전 아마도 오늘 죽을 거 같습니다.”
“아, 진짜! 이럴 거예요? 거짓말인거 다 안다고요!”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속에 백퍼센트를 장담할 수 없는 의심이 싹트면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 어쩌면 정말로 정신병이 있을 것 같았다.

“속는 셈 치고 집까지만 데려다 주세요. 불안장애 증상이 더 심해지는 거 같습니다.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해요.”
“사실대로 말해요. 거짓말이죠?”

‘넘어왔구나.’ 그가 속으로 씨익 웃었다.

“사람은 보고 싶은걸 보고, 믿고 싶은걸 믿죠.”
“우!”

수라는 화가나 씩씩 거리면서도 함께 차를 타고 갑대의 집으로 향했다.




“기왕 가는 거 기분 좋게 갑시다. 어차피 수라씨 집도 같은 방향인데.”
“뭘 기분 좋게 가요? 거짓말인거 다 아는데!”

그의 염장 질하는 소리에 그녀가 운전하면서 버럭 화를 냈다.




시트로엥 차가 주차한곳은 면목동 신축 오피스텔이었고, 갑대가 거주하는 곳은 5층이었다. 디지털도어락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예상한대로 핑크색 벽지에 공주풍 화이트 가구 인테리어였다. 현관 안쪽 벽에는 싱크대와 냉장고가 양옆으로 있었고, 바로 거실로 이어지면서 1인용 소파와 40인치 벽걸이 TV, 그리고 싱글 침대와 책상이 마주하고 있었다. 수라가 거주하는 연립주택 반지하 보다 공간은 작았지만, 신축건물이었고 붙박이장 구조라서 보다 여유롭고 깔끔했다.

“부자라서 큰집에 살줄 알았는데 의외로 원룸이네요?”

그녀는 생각보다 집이 아담해서 놀라는 눈치였다. 이정도 규모는 자신도 열심히 돈을 모으면 가능할거 같았다.

“제가 보기보다 소박하고 서민적인 면이 있죠.”
“아무튼, 이제 됐죠? 갈게요.”

이제 더 볼 거 없다면서 그녀가 나가려했다. 다급해진 그가 다시 앓는 소리를 했다.

“제가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손쓸 새도 없이 죽을 겁니다.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셨고, 알다시피 제 성격상 친구나 동료도 없어요. 무연고 죽음은 시체가 썩어서 발견된다고 하더라고요.”
“도대체 저한테 왜이래요! 성추행도 모자라 스토커에다가 이제는 피 말려 죽이려는 건가요?”

그녀가 미치고 환장하겠다는 표정으로 불같이 화를 냈다.

“불쌍한 사람 살린다 생각하고 간호해주면 합당한 보상을 하겠습니다. 카페알바로 받는 시급의 두배를 드리죠.”
“하다하다 이제 누굴 노예로 부려먹으려고!”
“부려먹으려는 게 아니라…….”
“자, 잠깐…… 얼마요? 카페알바 시급의 두배요?”

그녀는 며칠 전 커피전문점 알바를 그만둔 상태였다. 사장이 최저시급도 주지 않으면서 예쁘다고 추근거리는 게 짜증나 때려 쳤다.

“예.”
“정말요? 시간당 만원이에요.”
“시간당 얼마요?”

그는 계산을 어떻게 하면 두배가 만원이 되냐고 되물었다.

“마, 만원…….”

그녀의 목소리가 자신감을 상실해 쪼그라들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액수였다.

“얼마요?”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그녀를 쳐다봤다. 두배가 만원이면 그동안 시급 5천원 받고 일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좀 많이 부르긴 했죠? 좋습니다. 까짓 거! 2천원 빼고 8천원에 해드릴게요.”
“…….”
“더는 안 됩니다. 원래 두배라고 하셨잖아요. 저도 먹고 살아야죠. 보니까 병세가 한 일주일 갈 거 같은데. 정신병은 후유증이 무섭거든요. 이럴 때 계단 잘못 디뎌서 굴러 떨어지면 평생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어요. 부모형제도 없다고 하니 그럴 경우 누군가 재산관리를 해야죠. 그게 꼭 저라는 말은 아니고요. 아! 말 나온 김에 근로계약서 작성하죠.”

그가 나중에 딴소리하기 전에 근로계약서를 쓰고 못을 박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경우에도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나요?”
“개인병원 원장님이시니 근로계약서 많이 써보셨겠죠. 제가 원장님을 못 믿는 게 아니라, 세상이 참 그렇더라고요. 가끔 악덕 고용주들이 부려먹기만 하고 돈을 안줘요. 무슨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해야 한다나. 열정페이 타령하는 거 있죠? 아주 그 혀를 뽑아버리고 싶어!”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면서 치를 떨었다.

“…….”
“물론 원장님은 안 그러시겠죠. 그래도 모르는 거잖아요. 컴퓨터랑 프린터 있죠?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는 책상 노트북 전원을 켰다.

“잠시 만요.”

그가 당황하는 눈빛으로 황급히 그녀의 행동을 만류했다.

“알아요. 다른 폴더 안 볼게요. 안 봐도 비디오. 남자들 컴퓨터 절반이 야구동영상이죠. 원장님도 야구 좋아하시죠? 당황스러워 하시는 게 품번으로 정리해서 콜렉터 하는 단계쯤 되나요? 우리오빠는 장르별로 분류하던데. 시급만 안 떼먹고 주시면 제가 이런 것도 해드립니다.”

라고 하면서 태연하게 노트북을 사용했다.

“그 야구가…….”
“굳이 변명 하실 거 없어요. 원장님 겉으로 보기엔 내시 같아도 속은 남자의 본능으로 가득 차 있잖아요.”
“내, 내시라니요?”
“본인만 자각을 못했겠죠. 누가 보면 영락없이 고추 없는 줄 알아요.”
“저 고추 있습니다!”

자존심에 상처받았는지 그가 발끈했다.

“저는 원장님이 흑심으로 가득 찬 남자라는 걸 알죠. 그러니 성범죄도 저지르는 거잖아요. 자! 근로계약서 읽어보시고 사인하세요.”

그녀가 근로계약서 양식을 프린트해서 시급을 적은다음 그에게 건넸다.

“식사도 해주는 겁니까?”

그는 대충 읽어보고 사인을 한 후 배고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이죠. 배고프세요?”
“예.”
“잠시만 기다리세요. 라면 있죠? 없으면 근처 편의점가서 햇반하고 같이 사올게요. 제가 또 라면 기가 막히게 끓이거든요.”

그녀가 일어나 싱크대를 둘러보고 라면이 안보이자 나가려 했다.

“전 라면 안 먹습니다. 냉장고에 재료 있으니 자연식 유기농으로 제대로 된 요리를 해주세요. 얼마나 성실히 일하느냐에 따라서 추가수당을 지급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요? 이럴 줄 알았죠?”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 속에 의미를 알기 힘든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주면 주는 대로 드세요. 까나리 액젖을 한통 다 먹으라고 하기전에.”
“…….”
“왜요? 액젖 한통 쭉 마시고 싶으세요?”
“아하하하…… 갑자기 라면이 땡기네요.”
“그렇죠? 아마 며칠 계속 먹어도 신기하게 안 질릴 거예요.”
“아하하하…….”

그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굳어진 안면근육을 어색하게 실룩실룩 거리면서 웃어댔다. 영화 미저리가 현실화되는 분위기였다.

“이래도 제가 좋아요?”

그리고 뼈있는 질문.

“예.”

그의 대답은 간결하고 진실했다.

“음…… 그렇구나. 노력은 가상한데, 저는 좋아하는 오빠가 있어요. 그러니 너무 마음 주지 마세요.”
“한 번도 애인 만나는 거 못 봤어요.”

그녀가 소파에 앉으면서 애인이 있다고 말하자 당황한 듯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원장님처럼 짝사랑하고 있거든요.”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애절했다.

“사실 저 꾀병입니다.”

더는 속일 수 없는 듯 그가 불쑥 진실을 말했다.

“진짜 꾀병이었어요?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네요.”
“그래도 계약은 유효합니다.”
“제가 지금 돈 많이 버는 일자리가 필요해요. 집세도 내야하고, 생활비도 벌어야하고, 등록금도 마련해야하고, 미대는 재료비도 만만치 않거든요. 그래도 거짓말인걸 알면서 간병을 할 수는 없어요.”
“그러면서 제가 합의금 육천만원 드린 건 왜 거부한 거죠?”
“원장님도 양심에 찔려서 계속 거짓말 못하는 거잖아요. 저도 양심이 있는데 무슨 합의금으로 육천만원을 받겠어요. 일한만큼 돈 벌기를 원하는 거지, 공돈 바라지 않아요. 또 원장님은 죄를 합의금으로 해결하는 것 보다, 죽을 때 까지 반성하는 게 더 나아요.”
“그냥 합의금 받으세요.”
“원장님이 원해서 하려는 건 욕망충족이라니까요. 전 이만 갈게요.”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나갔고, 그는 더 이상 잡을 명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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