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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 3부28장
16-03-19 21:22 2,387회 0건
** 또 늦어서 죄송해요.




141. 드라큐라 & 이자벨 로랑




[1]
내일이 크리스마스이다. 이제 이틀 후이면 대학들이 정시 지원을 시작한다. 지혜가 대학에 지원하는 서류를 낼 수 있다. 지혜는 이 문제로 처음에는 한 동안 이런 저런 말을 엄청 많이 했지만, 요즈음에는 조용해졌다. 지혜 나름대로 선택과 결정은 이미 끝난 것이다. 아무튼 조용해져서 다행이다.

지혜는 이번에 모두 7개 대학에 지원하는데, 6개의 대학은 지혜의 실력으로 놓고 볼 때 어려움이 없지만, 일곱번째로는 대한대학교를 고집한다. 무리인 줄 알면서도 지원하기 때문에, 나와 윤기숙은 그냥 두고 보는 수 밖에 없었다.


오늘 나는 아이린과 함께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샀다. 저녁에는 수업 대신 파티를 하면서 선물을 나누어주었다.

밤 10시쯤에 파티가 끝나고 아이린은 권은희를 집에 태워다주었다. 나와 윤기숙은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고, 자러 간다고 올라간 지혜가 다시 내려왔다. 윤기숙은 지혜에게 물었다.



"왜? 무슨 일로 잠도 안자고 왔어?"
"언니. 컴퓨터 공학부에도 지원하면 안될까?"



지혜의 입에서 나오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갑자기 아찔해진다. 지금까지 조용했는데, 이제 막판 뒤집기가 시작되는 것 같다. 올 것이 온 것이다. 대학이 인생을 결정하는 이 사회도 문제지만,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불안해하는 지혜가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고민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고민하는 것이 좋기는 하다. 고민한다는 것은 자기 인생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온실 속에서 공부만 하던 지혜가 저런 고민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자기 진로에 대하여 평소에 관심이 있었고, 또 어떤 정보를 갖고 하는 고민이 아니라, 마치 로또 번호를 고르는 것처럼, 그냥 막연한 선택의 고민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혜를 나에게 오라고 불렀다. 저대로 두었다가는 애꿎은 윤기숙이 시달릴 것 같아서이다. 나는 윤기숙에게 눈짓을 해서 올라가라고 했다. 그렇지만 윤기숙은 궁금하다는 듯이 같이 앉아서 우리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다.



"한동안 조용하다 했더니, 왜 또 한밤중에 도깨비같은 생각을 하는데?"
"지금 떠오른 생각이 아니거든. 엄마가 PC방 할 때도 이런 생각을 하기는 했어."

"그니까 왜 하필 밤에 이러느냐고."
"왜 짜증이야? 밤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까?"

"그건 아니지. 사람이 생각하는데 시간이 따로 없으니까."
"오빠도 이 시간이 돼야 조용하니까 얘기를 해보겠다는 거야. 엄청 피곤해? 당장 자야 해?"

"아니야. 나는 괜찮아. 언니는 피곤하니까 올려 보내고 나랑 얘기해."




윤기숙도 자기 집에 갔다가 내일 저녁에 오겠다고 하면서 올라갔다.

지혜는 자기도 게임을 개발하는 것을 하고 싶은 생각은 있었는데,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다. 대한대학교 컴퓨터공학부 홈페이지에 가서 무엇을 배워서 나중에 진로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단다.



"구체적인 말은 없어, 글로벌 시대에 국제 경쟁력을 갖추고 어쩌고 하는 말은 패스하고, 자기네 과를 포장하는 말만 잔뜩 적혀있어. 필요한 것은 없고, 쓸데없는 말만 엄청 많아."
"거기서 무슨 과목을 배우나 뚜껑을 열어보면 어때?"

"가봤지. 그렇지만 그걸 무슨 재주로 알아먹어? 거의 다 영어야."
"그렇지. 거기서는 우리말은 별로 사용 하지 않으니까. 지혜한테는 너무 어렵겠다."

"거기 가면 인공지능 이런 것도 배우나?"
"인공지능? 지금 네가 생각하는 인공지능은 나중에 전문가가 되고 나서 얘기고, 대학에서는 그것을 개발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고 보면 될거야. 인공지능 배우고 싶니?"

"뭔지 알아야 배우든 말든 하지. 어차피 지금은 붙고 떨어지는 것으로 로또하는 심정이니까, 거기도 하나 내볼게."




인생의 항로를 결정하다시피 하는 중요한 문제를 로또를 하는 심정으로 하다니 ..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런 심정인 학생들이, 재수생들도 있으니까, 몇십만명이 된다는 말이다.



"그럼 자연과학 대학은 어쩌고?"
"거기도 내고. 약사도 해야지. 하하."

"뭐라고? 그럼 대한대학교에 두 개를 낸다고? 요새는 그게 가능하니?"
"어. 컴퓨터 공학부는 공대라서 문제 없대."

"욕심이 너무 큰데?"
"뭐야아. 언제는 나보고 욕심을 내랬잖아?"

"그렇다고 거기에 원서를 두 개나 넣는다고? 너는 장난으로 대한대학교에 입학원서 내니?"
"자꾸 그럴래? 뚜껑 열리면, 일곱 개 다 넣는다?"

"하든가."
"오케이. 하라면 못 할 줄 알아?"



지혜가 갑자기 화가 난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만일 지혜가 지금 저대로 문을 나가면, 끔찍한 재앙이 올 것이다.

나는 재빨리 지혜에게 가서 지혜의 팔을 잡았다. 지혜는 내 손을 뿌리친다. 나는 지혜를 두 팔로 안아버렸다. 지혜가 내 품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친다. 나는 지혜의 등을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지혜는 빠져나가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두 손으로 내 어깨와 가슴을 밀어낸다. 그래도 안되자 주먹으로 내 어깨를 친다.



"놔달라고."
"싫어."

"왜 안 놓는데?"
"예쁘니까."

"뭐야? 지금 이 판국에 그 말이 왜 나오는데?"
"왜 화를 내는데? 네가 갑자기 화를 내니까 더 예쁘잖아."

"취향도 참. 그래서 뚜껑 열리라고 엄청 약 올리고, 열리니까 이렇게 안고 안 놔주냐?"
"하늘이 안았는데 뭐가 어때서 놓으라는 건데?"

"바보 아냐? 바다가 하늘을 안는다니까."



지혜는 두 팔로 내 어깨와 목를 잡고, 몸을 내게 밀어붙인다. 내 입술에 난폭하게 키스했다. 내 입술을 앞이빨로 물고 당기더니 지긋이 깨문다. 사태가 안정된 것 같다.




"아프거든."
"아프라고 했으니까, 당연히 아파야지."

"왜 이러는데?"
"착하고 예쁜 여신한테 너무 얄밉게 하잖아."

"얄미우면 깨무냐?"
"안 아프게 했거든. 이번에는 다시 아프게 할까?"

"아니야. 됐어. 이건 뭐. 드라큐라도 아니고 .."
"나 드라큐라 맞거든. 아아앙."



지혜가 입을 열고 내 목을 깨물 것처럼 파고들었다. 그렇지만 지혜는 깨물지는 않고 혀를 내밀어서 내 목을 핥으며 입술로 빤다.

이 때 아이린이 들어왔다. 아이린은 윤기숙이 집에 간다고 나가는 것을 보고 자기 차를 내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와인을 마시다가, 지혜는 자러 올라간다고 가고, 나와 아이린은 오피스텔을 나섰다. 그녀를 아파트로 데려다 주면서 나는 지혜가 방금 한 이야기를 했다. 듣고 난 후에 아이린이 내게 물었다.



"컴퓨터공학은 공부하기가 더 어려울까요?"
"이제 막 고등학교 졸업하고 그런 것들을 배우려면, 어려운 것은 어디나 다 마찬가지 아니겠어?"

"그런 중요한 말을 왜 이제야 하는 거지?"
"하루하루 날짜가 다가오면서 점점 불안해지는 것이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들은 잘 모르겠고, 아마 불안한 것 때문에 고민이 제일 심할 때야."

"하아. .. 내일 지혜아빠랑 얘기해볼게요."





[2]
크리스마스 날은 조용히 넘어갔다. 나도 아침에 집에 가서 쉬고 왔다. 다음날부터 애들은 방학이다. 윤기숙이 애들을 데리고 대학 도서관에 다닌다. 나도 낮에는 회사 일을 하고, 저녁에는 애들과 만나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부터 정시 지원이 시작된다. 나는 회사에 있는데, 지혜가 하는 것이 궁금하여,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이다. 지혜는 카톡으로 생중계를 해준다. 몇 군데의 대학에서는 지원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서버가 다운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대한대학교에 자연과학대학과 공과대학에 모두 지원을 끝냈다. 오후 늦게까지 다른 대학들에도 지원서를 냈다고 한다. 지혜가 하루에 다 끝냈다는 말을 들으니까 기특하기도 하다.

그날 저녁에도 과외 수업이 끝나자 지혜는 또 와인파티를 하자고 했다. 아이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자리를 만들어준다.



"건배해줘."
"뭘로?"

"대한대학교 붙으라고."

"좋아. 우리 지혜 대한대 합격을 위하여!"
"건배!"




아이린과 윤기숙도 같이 건배를 했다. 나는 지혜에게 물었다.



"지르고 나니까 속이 후련해?"
"그누므 지름신 때문에 그 동안 피가 마르는 줄 알았다니까. 오늘 같은 날은 꼭 한 잔 마셔줘야 해."


"컴퓨터공학을 왜 꼭 하려고 그랬는데?"
"나중에 여자가 그런 일 하면 쫌 있어 보이고, 멋있어 보이지 않나?"

"뭐라고?"
"또 나 욕하려고?"

"전혀 아니거든. 내가 왜 지혜 욕을 하냐? 그냥 .. 너 하는 것 보니까 된장녀 기질이 다분해서 .."

"오빠!"
"깜짝이야. 왜?"

"욕 안 한다며? 방금 그게 욕 아니고 뭔데?"
"욕이 아니고, 너의 장래에 대한 가장 정확한 예측이야."

"또 드라큐라 한다? 오빠 피를 전부 다 빨아먹을 수도 있어."
"그럼 나 죽는데?"

"대학에 원서도 다 내놨으니까, 이제 오빠는 죽어도 되지 않나? 하하."



소름 돋는다.
쪼그만게. ..

그래도 지혜가 귀엽다.




[3]
나와 지혜는 토론토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아이린은 1월 3일 오후 3시에 인천 공항을 출발하여 캐나가 현지시간으로 오후 3시에 도착하는 비행기표를 구했다. 나는 한수정과 최은희에게 우리가 도착하는 날짜와 시간을 가르쳐주었다.

비행기 티켓을 받아놓으니까,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이면서 밤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다. 한수정을 다시 만난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최은희가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기는 출산했나? 산모나 아기는 건강한가? 남자애인가? 여자애인가? 척 아기는 여자였으면 좋겠다. 최은희를 닮는다면 엄청 예쁠텐데 ..


이미 경험이 있어서인지 아이린이나 지혜는 여행 준비를 차분하게 한다. 지난번처럼 필요 없는 물건들은 아예 전부 다 빼버렸다. 열흘 정도 머무르는 데에 꼭 필요한 물건만 캐리어에 담았다. 그래도 지혜는 출발 전 날 엄청 들떠 있다. 나는 지혜보다 더 들떠있지만, 안그런 척 연기를 했다.

1월 3일에 인천 공항에서 출발 전에 체크인을 끝내고, 아이린은 나와는 악수만 하고, 지혜를 꼬옥 안았다.



"오빠 애먹이지 말고, 잘 갔다 와."
"엄마도 참. 내가 왜 오빠를 애먹여? 오빠가 나를 애먹이거든요."



우리는 아이린과 작별하고 비행기에 탔다. 이번에는 캐나다 항공사인 에어캐나다(Aircanada) 비행기이다. 나는 체크인을 일찍 해서 창가에 있는 좌석으로 잡았다. 셋이 앉는 줄에 우리 둘이 앉았다. 이번에도 지혜는 창문 쪽, 나는 통로 쪽으로 앉았다. 그런데 빈 좌석도 제법 많다.

기내에는 한국인 스튜어디스는 보이지 않고, 거의 다 캐나다 여자들이다. 또 나이 드신 분들도 많다. 그녀들이 비행기 안을 오고 갈 때마다, 나는 그녀들을 유심히 쳐다보면서, 나이도 어리고 예쁘장한 여자를 찾아냈다. 지혜가 내 허벅지를 꼬집는다.



"이 응크미. 뭘 자꾸 쳐다보는데?"
"어?"

"내가 봐도 진짜 늘씬하게 잘빠졌다. 하나같이 다들 빈약한데도 없고 빵빵하네."
"그렇지? 그러니까 나도 보게 되는 거지."

"오빠가 이러니까, 내가 졸려도 잠을 잘 수가 없잖아."
"하하.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




그렇지만 지혜는 자려고 하지 않았다. 비행기가 이륙을 완전히 끝냈다. 스튜어디스들이 바쁘게 지나다닌다. 내가 찾아둔 스튜어디스가 지나갈 때, 그녀를 불렀다. 나는 프랑스어로 시작했다.



"저기요, 숙녀분?"
"예? 저요?"

"지금 바쁘죠?"
"예. 무슨 일입니까?"

"토론토 지금 엄청 춥죠?"
"서울이랑 비슷합니다. 그래도 이번 겨울이 작년보다는 덜 춥다고 합니다."

"비행이 오래 걸리는데, 계속 일하시려면 힘드시죠?"
"감사합니다. 이것은 내가 늘 하는 일인걸요."





그녀의 예쁜 얼굴이 환해진다. 여기까지는 겨우 작업의 시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녀에게 먹혀 들어간다. 그녀의 큼직한 젖가슴에는 Isdabelle Laurent (이자벨 로랑) 이라는 이름이 적힌 신분증이 걸려있다. 지혜가 우리 둘을 쳐다보면서 답답해한다.




"미안하지만, 위스키 언더락으로 주실 수 있어요? 잠을 자고 싶어서요."
"갖다 드리겠습니다."

"옆에 있는 꼬마 레이디를 위해서 와인도 한 잔 부탁해요."
"하하. 알겠습니다. 금방 갖다 드리겠습니다."

"천천히 주셔도 돼요."
"아닙니다. 그럼 혹시 신문은 필요하지 않으세요?"

"영어판이랑 불어판 하나씩 주실래요?"
"예. 알겠습니다.




나는 이 말을 불어로 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갔다. 지혜가 또 내 허벅지를 꼬집는다.



"뭐라고 했어?"
"마실 거랑 신문 갖다 달라고 했어."

"그 말을 하는데 그렇게 오래 걸려? 요점만 간단히 하면 안돼? 둘이 같이 웃고 난리가 났더만?"
"조금 있다가 스튜어디스가 가져오는 것을 보면 알텐데."

"앞으로는 프랑스어로 하지마. 영어로 해."
"왜 그러는데?"

"나 왕따시키고 둘이만 그러니까 .."
"영어로 해도 마찬가지일텐데?"

"나 이번에 영어 듣기 하나도 안 틀렸거든?"



그 스튜어디스가 다시 나에게 왔다. 나는 신문을 받아서 무릎에 놓고, 앞 의자에 붙어있는 미니식탁을 펼쳤다. 그녀는 우리에게 와인과 위스키를 주었다. 나는 또 프랑스어로 말해버렸다.



"감사합니다."

"또 필요하신 것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나에게 몸을 숙인다. 가까이에 와 있는 그녀의 하얀 얼굴이 너무 예쁘다. 두 눈에서 초록색 빛이 반짝인다. 우리는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토론토에 가십니까? 이번에 가시면 며칠 동안 계시나요?"
"일주일 있을 예정입니다. 내 친구가 대학원 과정을 토론토 대학에서 하고 있어서 만나려고."

"오 마이 갓.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서 토론토에 가신다고요? 그럼 여자친구죠?"
"내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은 거짓말이라고 할거죠?"

"하하. 그럼요. 당연하죠. 그 옆에 계신 꼬마 숙녀는 동생?"
"맞아요."

"토론토에서는 어디에 머무르나요? 코리아타운?"
"아니요. 로즈데일(Rosedale)."

"하아.. 나도 거기 사는데. 휘트니 애브뉴 (White Ave.)."
"나는 베이뷰 애브뉴(Bayview Ave.), 돈강 (Don River) 쪽으로."

"거기서 나 조깅하는데. 하하."
"그럼 나도 조깅하러 가야지. 하하."

"꼭 오세요. 만나면 커피 살게요."
"그럼 나는 케익 살게요. 정말 친절하시고 예쁜 분이시네요."

"고마워요. 당신도 멋있는 한국인이야. 내 오빠가 한국인 여자랑 결혼해서, 리버티 빌리지(Liverty Village)에서 살아요. 우리 만나서 코리아타운에도 자주 가요."

"아. 그래요? 다음에 내가 당신이랑 그 분 가족들을 초대해도 될까요?"
"일단 나부터 초대해요. 좋은 분인지 테스트해보게. 하하."

"알았어요. 언제쯤 토론토에 있죠?"
"이번에 들어가면 10일 정도 쉽니다."

"그렇게 오래 쉰다고? 혹시 건강이 좋지 않아요?"
"아닙니다. 나는 건강해요."

"이름이 이자벨 로랑 (Isdabelle Laurent) 맞아요?"
"예. 당신은요?"

"태현. 김 태현."




이자벨은 나에게 자기 휴대폰 번호와 이름을 적어주고, 나에게서도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받아서 갖고 갔다. 이자벨이 가고 나자 지혜는 이번에도 또 내 허벅지를 꼬집는다. 그런데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애는 엄청 아프다.



"와아아. 돌겠다."
"왜?"

"그새 작업 걸어서 번호를 따냐? 진짜 존경스럽다. 비행기에서, 그것도 국적도 안 가려. 완전 신이 내린 작업꾼이네."
"누가 작업을 걸었다고 그래?"

"그게 작업 맞잖아? 어딜 잡아떼려고. 영어로 이야기 하라니까 왜 또 불어로 이야기 하는데?"
"성인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 중에는 19금도 있거든. 하하."

"뭐야? 그럼 드라큐라 한다?"
"알았어. 그러지 마."

"그런데 쟤들 전부 다 왜 저렇게 키가 커?"
"일어서서 저 위에 있는 짐칸에 짐을 넣고 뺄 수 있어야 하잖아? 왜? 그것도 마음에 안 들어?"

"하아. .. 그럼 나는 키가 작아서 스튜어디스는 못 하겠네?"
"뭐야? 이제는 또 스튜어디스가 하고 싶어?"

"오빠가 스튜어디스한테 작업 걸으니까 .."
"작업 걸은 것이 아니라니까."

"나중에 한수정언니한테 물어볼까?"
"말하기만 해."

"오빠도 한수정언니 무섭지?"
"어."



지혜는 와인을 마시고, 나는 위스키를 마셨다. 이자벨은 지나가는 길에 나에게 캔이나 먹을 것을 살짝 주고 간다.

한번은 이자벨이 내 앞쪽에서 다른 스튜어디스랑 천천히 오면서 나에게 윙크를 했다. 지혜는 이 장면을 보지 못했다.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 귀에 들린다. 두 여자의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가 내 얼굴을 스캔하는 것이 느껴진다.



"저 남자야. 어때?"
"와아. 너무 멋있어. 욕심난다."

"이번에 일주일 머무른대. 내가 사는 집에서 가까운 곳이야. 나랑 같이 조깅도 하기로 했어."
"딱 하루만 나한테 .. 안될까?"

"아니야. 싫어. 안돼. 그럴 일 없어. 절대로 그런 생각 하지마."
"딱 하루도 안 돼?"

"안 돼. 너는 그 날 바로 잘 거잖아. 너도 지나다니면서 보고 선택해."
"아무도 나한테 말을 시키지 않는데? 기껏해야, 이거 이거 갖다 줘라 하고, 그래서 갖다 주면? 고맙다. 그러면 끝이야."

"그럼 네가 먼저 말을 걸어."
"흐으음 .."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가? 지혜가 이 말을 알아듣지 못 해서 천만 다행이다. 답답할 때는 지혜와 같이 기내를 한 바퀴 돌기도 했다. 뒤쪽에 가니까, 스튜어디스들이 빈 좌석에서 앉아서 쉬고 있다. 그녀들도 사람인데, 피곤할 때는 쉬어야지. 이자벨이 나를 보더니 멈추라고 손짓을 한다.




"당신, 여기 왜 왔어? 나 찾으러 왔어?"
"어."

"왜? 와인이나 커피 필요해?"
"10분 후에 가져오면 고맙지."

"보고 싶어서 왔다고 안 하면 안 줄거야."
"보고 싶어서 왔어."



이자벨 주변에 있던 다른 스튜어디스들이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와 이자벨이 하는 말을 듣다가 킥킥대고 웃는다.

우리가 자리로 돌아오는데, 이자벨도 따라온다. 그녀는 커피와 먹을 것, 와인을 챙겨왔다. 그녀가 내려놓으며 나에게 소근거렸다.



“이런 정도는 비즈니스 석에 보내는 거야.”




우리는 기내식도 먹고, 영화도 보고, 잠도 자면서 지루한 비행시간을 보냈다. 도착할 때가 되자 이자벨이 지나가면서 내게 말했다.




"꼭 전화해. 오케이?"
"이자벨도 전화해."

"내가 여자니까 먼저 전화할 수는 없어. 태현이 먼저 해."
"접수."

"내 오빠의 아내가 태현을 만나면 정말 좋아하겠다."

"그녀는 몇 살인데?"
"지금 34이고, 9월에 35."

"이자벨은?"
"너는 여자 나이를 물어보니?"

"국제적인 신뢰가 우선이니까."
"뭐라고? 국제적인 신뢰? 그게 나이랑 무슨 상관이지? 28. 태현은?"

"여자가 남자 나이를 왜 물어?"
"하아. .. 태현은 나쁜 남자?"

"예. 만나서 커피 사면 가르쳐줄게."
"너는 나한테 케익 안샀어도, 나는 내 나이를 가르쳐줬는데?"

"너는 예쁘고 착하니까."
"그럼 너는 멋있기는 하지만, 안 착해?"

"어. 네가 아까 나쁜 남자라고 했잖아."
"하하. 토라졌군. 아듀(adieu)"



이자벨은 가버렸다. 지혜는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려서, 창 밖의 구름을 머엉하니 바라보고 있다. 이자벨이 저만큼 앞으로 가고 나서야 지혜가 나를 쳐다본다.



"오빠."
"어?"

"저 여자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
"다른 스튜어디스보다는."

"내가 봐도 예쁘기는 하다. 마실 것, 먹을 것을 놓고 가는 것 보면 귀엽기도 하고."
"네가 봐도 그렇지?"

"그런데 저 여자한테 진짜로 전화 할거야?"
"글쎄 .. 아직 모르겠는데?"

"안 한다고는 안 하네."
“내일 아침에 조깅하러 갈 대 ..”

“웬일로 생전 안 하던 조깅을 한대?”
“그럴 일이 좀 있어.”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며 착륙을 준비한다. 우리는 안전벨트를 하고, 지혜는 내 손을 꼬옥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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